나무(木) 로 만든 집(官)이란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구(柩)라 불리는 것도 나무(木)로 만든 괘가 오래(久)지탱하도록 만들어졌다는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관(棺)과 곽(槨)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관이라는 것은 시신만 들어가는 것이고, 곽이라는 것은 시신과 부장품이 함께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곽의 내부에는 관이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곽만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곽은 관보다도 규모가 큰 것이 됩니다. 시신을 담아서 장지까지 운반(운구)하는 상자로서 상가의 형편과 용도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퇴관용,입관,매장용,화장용,석관)
관의 제작 사용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생산경제가 이루어져 생활이 안정되고 죽은 자에 대한 경의(敬意)와 조상숭배가 결합될 무렵에 각지(各地)에서 제작 사용된 것으로 계통상으로는 3원적(三元的)으로 되었습니다.
첫째, 유아(幼兒)등을 적당한 항아리에 묻던 풍습에서 유래 된 것 [고대 잉카의 옹관(甕棺)]
둘째, 지면(地面)을 판 토광(土壙)에 직접 묻는 것을 꺼려 돌궤(石櫃) 또는 목궤(木櫃)속에 넣어 묻는 것에서부터 유래된 것.
셋째, 지면을 판 토광의 주벽(周璧)이나 천장을 판석(板石)또는 널빤지로 둘러서 묻은 것에서 유래 된 것 (이집트 제2왕조이래 조합식 목관 발달)관의 발안(發案)=계급사회가 성립된때.
계급사회의 급격한 발전=분묘(墳墓)와 관(棺) 급속도록 호화롭게 됩니다. 관의호화로움은 이집트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까지 이어집니다.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있는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은 모든 현존하는 관(棺)중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대리석관 외부에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전투를 나타내는 그림과 수렵도를 부조(浮彫)하였으며 관의 전체적인 외관 (外觀)은 신전(神殿)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중세 이후에는 육체보다는 영(靈)과 정신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간소한 모양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이후 중국과 같이 목관을 사용하여 매장하였습니다.
칠관(漆棺)이라 부르며 중국의 관에 비하여 매우 검소하고 두께가 비교적 얇고 외관(外觀)이 화려하지 않은 장방형의 모양을 사용하였습니다.
권세와 부를 가진 자들은 좋은 재질의 목관을 사용하고 석곽(石槨)을 외관(外棺)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민 이하 하층민들은 평범한 목관조차 없이 거적에 말아서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富)에 의하여 관의 선택을 제약(製約)받아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대에 들어와 전근대적인 신분차별이 없어지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이나 권력에 관계없이 관을 선택하게되었습니다.
매장,화장,관장(棺葬),탈관(脫棺)에 따라 관을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